15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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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럼은 저 쪽이야. 이거 좀 무거운데... ."
"괜찮다니까요! 주세요."
"염동력자들 시키면 된다니까, 아, 좀 앞으로. 오늘 끝나고 카페라도 갈까?"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자꾸 그러지 마시라니까요. 진짜죠? 약속했어요. 새로 찾은 카페 있어요. 같이 가는 거죠?"
"어, 어? 그래."
성격상 듣기 좋으라고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은 아니었겠지만 순식간에 약속을 낚아챈 내 반응에 놀란 듯했다. 세트 드럼을 선배가 고갯짓으로 가리킨 자리에 가져다놓고 위치를 조정했다. 선배가 미안해하는 것 같아서 안 힘든 척 하려고 애 좀 썼다. 금속 덩어리의 후유증이 팔을 타고 저릿저릿 올라온다. 안 쓰던 근육을 혹사시켰더니 대체 왜 이러냐며 비명을 질러대는 느낌이지만 아무래도 좋다. 카페 약속을 얻을 수 있다면 뭔들 못 들어올릴까.
"됐어, 이제. 나머지는 부원들이 알아서 맞출 거야."
"그럼 지금 가요?"
"너 전시회는?"
"이미 출력 끝났어요. 됐죠? 가요."
주저 않고 오른손을 잡아채 강당 밖으로 향했다. 큰 키 탓에 끌려오는 모양새가 되어 엉거주춤하게 걸음을 옮기는 선배의 떨떠름한 시선이 느껴진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 단 둘이 이런 공간에 있는 건 많이 떨린다. 심박 소리가 선배의 귀에까지 닿아버릴까봐.
15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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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다. 나도 모르는 새에, 온 세상이.
늘 보던 배경이란 것은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인식하기가 배로 어려운 법이다. 벚꽃이 만개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극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가. 발끝의 움직임을 따라 호흡을 세던 중 새삼스레 들어올린 시선에 완연한 분홍빛이 한 장 들어서고 나서야 거리를 가득 메운 색채가 온 감각을 찔러댔다.
바람이 천천히 지나며 가지마다 섬세하게 숨결을 더했다. 따뜻한 기운에 쨍한 색감이 풀어진 나른한 하늘의 사이로 꽃잎이 섞여드는 모습이 퍽 감각적이다. 벚꽃은 예쁘다. 대부분이 동의할 것이다. 선배도 좋아한다고 했다.
꽃잎 몇 장이 자그마한 돌개바람을 그려내며 지나갈 동안 나는 가만히 멈추어 있었다.
여지없이 가슴이 기분 좋게 뛰기 시작했다. 왜 봄을 인식할 틈도 없었는지 알았다. 온 천지가 벚꽃이다. 나도, 봄이다.
가지 사이로 드리워진 프레임 너머로 그 사람이 천천히 걸어간다. 노출을 잘못 준 사진마냥 지나치게 눈이 부셨다.